인문학 산책 · 15편
아이가 두 살 무렵, 갑자기 모든 것에 "내 거야"를 붙이기 시작했다.
엄마 핸드폰도 내 거, 아빠 컵도 내 거, 심지어 길 가다 본 강아지도 내 거.
어린이집에서도 친구 장난감을 "내 거"라며 놓지 않아 충돌이 생겼다.
발달 전문가들은 이것이 정상적인 자아 발달의 신호라고 말한다. '나'와 '너'의 경계를 배워가는 과정이라고. 그런데 이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득 신화 속 나르시소스가 떠올랐다.
자기 자신의 반영을 사랑하다 스러진 청년. 어쩌면 그것도 이 "내 거야"의 어른 버전이 아닐까.

건강한 자아 경계가 병적인 자기집착으로 굳어지는 과정.
심리학자들이 왜 그토록 많은 개념을 그리스 신화에서 빌려왔는지, 아이를 키우면서 조금씩 이해하기 시작했다.
신화는 인류가 수천 년에 걸쳐 자신의 내면을 이해하려는 시도로 만들어낸 가장 오래된 심리학이었다.
2. 나르시소스 —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다
3. 에로스 — 사랑의 두 얼굴
4. 신화가 심리학보다 먼저 알았던 것
5. 인문학적 시선 — 신화를 다시 읽는다는 것
오이디푸스 — 알고 싶지 않은 진실
테베의 왕 라이오스는 신탁을 듣는다. 태어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것이라고. 왕은 아들을 산에 버린다. 그러나 아이는 살아남아 코린토스의 왕자로 자란다.

어른이 된 오이디푸스는 신탁의 내용을 듣고 운명을 피하려 고향을 떠난다. 그리고 바로 그 도피 과정에서 길에서 만난 노인(친아버지 라이오스)을 죽이고, 테베에 도착해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고 왕이 되어 왕비(친어머니 이오카스테)와 결혼한다.
진실이 밝혀질 때, 이오카스테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오이디푸스는 눈을 찌른다.
프로이트는 이 신화를 아이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아버지를 경쟁자로 여기는 심리의 상징으로 해석했다. 이것이 유명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다. 앞서 살펴봤듯이 이 해석은 오늘날 많은 비판을 받는다. 그러나 신화 자체에는 훨씬 더 풍부한 심리학적 함의가 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어머니를 사랑한 것이 아니다.
그의 비극은 진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이 진실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경고하고 말리는데, 오이디푸스는 끝까지 알아내려 한다. 그리고 알고 난 후 스스로 눈을 찌른다. 지식과 고통의 역설이다. 모든 것을 알려는 욕망, 그리고 그 앎이 가져오는 파괴.
육아에서도 이런 순간이 있다. 아이에 대한 진실, 내 양육 방식의 문제, 내 관계의 균열. 알면 불편하기 때문에 외면하고 싶은 것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는 그 부인(否認)이 결국 얼마나 오래 지속될 수 없는지를 보여준다. 진실을 직면하는 것이 고통스럽더라도, 외면이 더 큰 파국을 만든다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보면 오이디푸스는 부인(Denial)의 극단적 실패를 보여주기도 한다. 우리는 때로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살아간다.
나르시소스 — 자기 자신과 사랑에 빠지다
나르시소스는 강의 신과 님프 사이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청년이다. 모든 이가 그를 사랑했지만, 그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를 사랑한 에코(Echo)는 자신의 목소리를 잃고 산속의 메아리로 남게 되었다.

결국 신들은 나르시소스에게 벌을 내렸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지게 한 것. 그는 연못을 떠나지 못하고 스러져갔고, 그 자리에 수선화가 피어났다.
현대 심리학이 구분하는 두 가지 나르시시즘
| 유형 | 특징 |
|---|---|
| 과대적 나르시시즘 Grandiose |
자신이 특별하고 우월하다는 강한 확신. 타인의 인정을 원하지만 취약성을 드러내지 않는다. 외향적이고 지배적이다. |
| 취약한 나르시시즘 Vulnerable |
내면의 열등감을 감추기 위해 자기중심적 방어를 사용한다. 비판에 매우 민감하고, 겉으로는 수줍어 보이지만 내면에서는 특별함을 갈망한다. |
신화 속 나르시소스가 보여주는 것은 단순한 자기도취가 아니다. 그는 실제로 타인과 연결되지 못했다. 에코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결국 자기 자신의 반영만을 사랑했다. 진정한 연결의 실패다.
나르시시즘의 역설은 자신을 너무 사랑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아닌 이상화된 이미지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아이의 "내 거야"는 건강한 자아 발달이다. 그러나 그것이 타인을 고려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채 굳어지면, 나르시소스가 된다. 이것이 내가 아이에게 "같이 써", "친구한테 빌려줄 수 있어?"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다. 자아 경계를 갖되, 타인과 연결되는 법을 함께 배우는 것.
에로스 — 사랑의 두 얼굴
초기 그리스 우주론에서 에로스(Eros)는 단순한 큐피드가 아니다. 혼돈(Chaos) 다음으로 탄생한 원초적 힘이었다. 세상 만물을 결합하고 끌어당기는 근본적인 원리.

플라톤의 《향연》에서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다. 원래 인간은 둘로 쪼개지기 전 완전한 존재였다. 너무 강해진 인간을 두려워한 제우스가 이들을 둘로 쪼갰다. 그 후 반쪽이 된 인간들은 잃어버린 나머지 반쪽을 찾아 헤맨다. 그것이 사랑이다.
이 신화는 사랑을 결핍과 갈망의 언어로 표현한다. 우리가 사랑을 할 때 느끼는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될 것 같은" 감각. 그 감각의 신화적 설명이다.
아이를 낳고 처음 안았을 때 나는 이 신화가 생각났다. 이 작은 사람이 내 몸에서 나왔는데, 이제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됐다. 잃어버린 반쪽을 찾은 것도, 반쪽을 잃은 것도 아닌 이상한 감각. 새로운 우주가 생긴 것 같은 느낌. 에로스는 결핍에서 오는 사랑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연결에서 오는 창조이기도 하다.
신화가 심리학보다 먼저 알았던 것
칼 융은 신화를 집단 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의 표현으로 보았다. 전 세계 문화권에서 비슷한 신화들이 독립적으로 발생하는 것은, 그것들이 인류 공통의 심리적 패턴인 원형(Archetype)을 반영하기 때문이라고.
영웅의 여정, 위대한 어머니, 현자, 트릭스터. 이 원형들은 수천 년간 인류의 이야기 속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은 세계 신화에서 동일한 구조를 발견하고 이를 단일신화(Monomyth)라고 불렀다. 신화는 인류가 공유하는 내면의 지도다. 심리학이 과학적 방법론으로 이제 막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들을, 신화는 수천 년간 이야기의 형태로 담아왔다.
오이디푸스, 나르시소스, 에로스. 이 이름들이 심리학 용어로 살아남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신화들은 수천 년 전 인간이 자신의 내면에서 발견한 패턴들이다.
· 타인과 연결되지 못하고 자신의 반영만을 사랑하는 비극
·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헤매는 사랑의 갈망
이것들은 고대 그리스인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인문학적 시선 — 신화를 다시 읽는다는 것
신화를 단순히 고대인의 미신으로 보는 시각은 빈약하다. 신화는 합리적 사고 이전의 사고가 아니라, 다른 방식의 사고다. 신화는 논리적 증명이 아닌 이미지와 이야기로 진실을 전달한다.
나르시소스의 이야기는 자기도취의 위험을 통계로 증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미지,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스러져가는 청년은, 어떤 학술 논문보다 더 강렬하게 그 위험을 전달한다.
심리학자 제임스 힐먼(James Hillman)은 원형 심리학(Archetypal Psychology)을 통해 신화적 사고를 현대 심리치료에 통합하려 했다. 우리 안에는 영웅도 있고, 트릭스터도 있고, 어머니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다. 이 모든 목소리들의 합창이 우리라는 존재다.
마치며
아이가 "내 거야"를 외치는 것을 보면서 나는 나르시소스를 생각했다. 그리고 나 자신도 생각했다.
나는 얼마나 타인과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내 자식, 내 남편, 내 일. "내 거"에 집착하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을 실제로 보고 있는가.
신화를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내면을 읽는 것이다. 그 오래된 거울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을 새로운 방식으로 만난다.
당신 안의 오이디푸스는, 나르시소스는, 에로스는
지금 어떤 상태인가요?
다음 편에서 또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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