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전체 글62 언어가 생각을 지배한다 사피어-워프 가설과 심리언어학 들어가며 — 아이의 언어가 나를 바꿨다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나는 예상치 못한 경험을 했다.아이는 처음에 감정을 "싫어"와 "좋아" 두 가지로만 표현했다. 밥이 싫어, 가기 싫어, 자기 싫어. 어른의 눈에는 단순해 보이는 그 언어 속에서 아이가 느끼는 것들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뒤늦게 알아채는 경우가 많았다.그런데 어느 날 문득 나 자신을 돌아봤다. 나도 크게 다르지 않구나."기분이 안 좋아." 이 말을 얼마나 자주 쓰는가. 그 안에 피로함이 있는지, 외로움이 있는지, 억울함이 있는지, 실망이 있는지 구분하지 않고. 아이에게 더 풍부한 감정 언어를 가르치려다가, 정작 내 감정 언어가 얼마나 빈곤한지를 발견했다.언어가 감정을 만든다는 것을 아이를 키우면서 처음으로 실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단순한 언.. 2026. 6. 17. 우리는 왜 악인에게 공감하는가 — 악의 평범성과 공감의 역설 들어가며 — 아이에게 화를 낸 날아이에게 심하게 화를 낸 날이 있었다.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피곤했던 날이었다. 아이가 밥을 안 먹겠다고 버텼다.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이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아이를 재우고 혼자 앉아 생각했다. 나는 왜 그랬을까. 나쁜 엄마인 걸까. 아니면 그냥 너무 지쳐있었던 걸까. 그 경계가 어디인지 모르겠었다.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이 질문과 정면으로 마주했다. 평범한 사람이 나쁜 행동을 할 때, 그것은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상황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드라마나 영화를 보다가 문득 이런 경험을 한 적 있는가. 분명히 악당인데, 그의 말이 어딘가 이해된다. 그의 상처가 보인다. 심지어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납득이 된다. 그리고 그 납득에 스스로 당황.. 2026. 6. 12. 카뮈의 이방인과 감정 둔화 — 실존주의와 심리적 해리 들어가며 —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날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한 첫 주였다.아이를 어린이집에 맡기고 사무실에 앉았다. 동료들이 반갑다고 인사를 건넸다. 나도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기쁜 것 같은데 기쁘지 않았다. 걱정되는 것 같은데 걱정이 실감 나지 않았다. 무언가 두꺼운 유리 뒤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퇴근하고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가 달려와 안겼다. 나는 꼭 안아줬다. 그런데 그 순간에도 내가 지금 기쁜 건지, 안도하는 건지, 미안한 건지 잘 모르겠었다. 그냥 몸이 움직이고 있었다.그날 밤 문득 생각했다. 나, 괜찮은 걸까.카뮈의 소설 《이방인》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면 어제였는지도 모른다."뫼르소는 누구인가뫼르소는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사무직 직원이다.. 2026. 6. 11. 트라우마는 어디에 남는가 — 몸과 마음의 기억 들어가며 — 아이를 키우다 마주한 질문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유치원을 가기 싫다고 했다.전날까지 멀쩡하던 아이가 현관 앞에서 울음을 터뜨렸다. "왜?"라고 물어도 "그냥"이라는 대답뿐이었다. 나는 처음엔 떼쓰는 거라고 생각했다. 달래기도 하고, 살짝 다그치기도 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나중에야 알게 됐다. 며칠 전 체육 시간에 친구 앞에서 넘어지면서 아이가 크게 창피함을 느꼈던 것이었다. 아이는 그 순간을 말로 꺼내지 못했다. 그냥 그 장소가 싫어졌고, 몸이 먼저 거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그때 나는 처음으로 실감했다. 트라우마는 어른에게만 생기는 게 아니구나. 그리고 그것은 말이 아니라 몸으로 먼저 나타나는구나.전쟁에서 돌아온 군인이 자동차 배기음에 바닥에 엎드린다. 어린 시절 .. 2026. 6. 9. 롤플레이의 심리학: 페르소나, 가면 그리고 진짜 나 롤플레이의 심리학: 페르소나, 가면 그리고 진짜 나우리는 하루에 몇 개의 얼굴로 살아갈까?직장에서의 나와 가족 앞에서의 나는 다릅니다.친한 친구와 있을 때의 모습과 연인 앞에서의 모습도 다릅니다.SNS에서 보여주는 나 역시 현실 속의 나와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어떤 상황에서는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되고, 어떤 상황에서는 조심스럽고 신중한 사람이 됩니다.그렇다면 이 다양한 모습들은 모두 진짜 나일까요?아니면 우리는 매일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일까요?심리학은 오래전부터 이 질문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오늘은 칼 융의 페르소나 이론, 그림자 심리학, 그리고 사회심리학의 자아 개념을 통해 인간이 왜 다양한 역할을 연기하는지 살펴보겠습니다.페르소나란 무엇인가?페르소나(Persona)는 심리학자 칼 융(Carl .. 2026. 6. 2. 왜 우리는 악당의 이야기에 끌릴까 — 섀도우 심리학과 융의 분석심리학 왜 우리는 악당의 이야기에 끌릴까 — 섀도우 심리학과 융의 분석심리학영화나 드라마를 보다 보면 이상한 경험을 한다. 분명 나쁜 짓을 하는 악당인데, 이상하게 이해가 된다. 심지어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이 끌림이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융의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이해하게 됐다.융의 섀도우 개념칼 구스타프 융은 인간의 무의식에 '섀도우(Shadow)'가 있다고 말했다. 섀도우는 내가 의식적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욕구, 충동, 감정들의 집합이다. 공격성, 질투, 욕망, 이기심 같은 것들. 사회화 과정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을 억누르고 '좋은 사람'의 페르소나를 유지하는 법을 배운다.하지만 억압된다고 사라지는 건 아니다. 섀도우는 무의식 속에서 계속 살아있다. 그리고 그것이 외부의 '악당'.. 2026. 5. 27. 링컨은 우울증을 어떻게 이겨냈나 — 고통을 동력으로 바꾼 심리학 링컨은 우울증을 어떻게 이겨냈나 — 고통을 동력으로 바꾼 심리학에이브러햄 링컨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힌다.그런데 그가 심각한 우울증 환자였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링컨의 주변인들은 그가 때로 며칠씩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다고 기록했다.죽고 싶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는 기록도 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내전이라는 최악의 시기에 나라를 이끌 수 있었을까.링컨의 우울, 그리고 시대링컨이 살던 19세기에는 우울증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당시엔 '멜랑꼴리아'라고 불렸고,나약함이나 인격 문제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링컨은 자신의 상태를 숨기지 않았다.역사가 조슈아 울프 생크는 링컨의 멜랑꼴리아에서 링컨의 우울증이 그를 약하게 만든 게 아니라,오히려 고통받는 타인에 대한 깊은 .. 2026. 5. 26. 왜 착한 사람이 더 잘 속을까 — 공감 능력과 가스라이팅의 심리학 왜 착한 사람이 더 잘 속을까 — 공감 능력과 가스라이팅의 심리학주변에 유독 나쁜 사람에게 잘 이용당하는 사람이 있다. 착하고, 공감 능력이 높고, 배려심 깊은 사람들이 오히려 그런 경우가 많다. 처음엔 단순히 세상 물정을 모르는 탓이라 생각했는데, 심리학적으로는 훨씬 복잡한 이유가 있었다.공감 능력의 양면공감 능력은 인류가 사회를 이루며 살아남기 위해 발달시킨 핵심 기능이다. 타인의 감정을 읽고 그에 맞춰 반응하는 이 능력은 관계를 유지하고 협력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이 능력이 높을수록 조작에 취약해지는 역설이 있다. 공감 능력이 높은 사람은 타인의 고통에 강하게 반응한다. 누군가 힘들다고 하면 자신의 판단보다 상대의 감정을 우선시한다. 조작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든다.가스라이.. 2026. 5. 25. 이전 1 2 3 4 ··· 8 다음 반응형